기사자료실[한겨레 칼럼]민간인 학살의 중심에 섰던 국가보안법

관리자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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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의 중심에 섰던 국가보안법

등록 :2021-06-02 15:05수정 :2021-06-02 15:21

[왜냐면]


정석희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충남 유족연합회 회장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민중들은 광복의 기쁨보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울분이 전국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민중항쟁이 1946년의 대구10월항쟁, 1948년 제주4·3항쟁, 1948년 여순항쟁이다. 이때 미군정 포고령이니, 긴급명령이니 하는 따위의 마구잡이식 공권력을 앞세워 수만 민중의 목숨을 빼앗았다.

불안한 미군정 3년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승만이 1948년 8월15일 단독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2월1일 헌법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 국가보안법을 울타리 삼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미 점령군의 절대적 지원을 받은 이승만 정권은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 등과 극우 서북청년단이 중심이 되어 소위 사상전향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보도연맹을 1949년 6월5일 창립했다. 말이 사상전향이지 원래 지지기반이 허약한 이승만 정부에 저항하거나 저항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관변조직으로 미리 포섭하여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들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49년 6월5일에서 1950년 6월25일까지 1년이란 짧은 기간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연맹원 수가 33만명에 이르렀다니 국가보안법의 위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나자 보도연맹원 명부는 곧바로 처형자 명부로 바뀌어 전쟁 초기 인민군에 쫓기면서도 30만명의 보도연맹원을 끔찍하게 학살하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몰살이나 다름없는 대학살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결처분하라는 증거 생략의 대통령 긴급명령은 시체의 수습마저 불가능하게 하여 무덤이 없는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도 모자라 6·25전쟁 3년 내내 전선 밖에서는 부역자니, 예비검속자니, 요시찰자니 하는 등의 빨갱이 꼬리표를 달아 학살을 자행하였으니 이름하여 ‘한국전쟁 100만 민간인 학살’이다. 그 학살의 중심에 국가보안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유가족들에게 다시 연좌제의 족쇄를 채워 ‘비국민’으로 내몰았던 중심에도 국가보안법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위헌적이고 인권침해적 소지가 너무나 커서 국제인권위원회에서조차 여러번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그런데도 역대 어느 정부도 이 법에 손을 대지 못했는데,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보 포기’라는 동의어로 안보 불안을 부추겨온 군부독재정권과 안보 장사를 해서 재미를 보아온 보수정권의 장단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다수 국민의 선한 침묵까지 더해져 악법의 폐지를 가로막아왔는지 모른다.

빨갱이로 시작된 반공주의가 다시 종북주의로, 종북좌파로, 종북좌빨로 중단 없는 증오의 굿판에는 항상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치안유지법에서 시작하여 100년을 이어온 국가보안법이 똬리를 틀고 있는 한 국민의 기본권조차 국가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국가공권력의 남용으로 죄 없는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마저 박탈함은 물론 천부의 생명까지도 빼앗는다.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읽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언제 어디서나 평범하지 않은 악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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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97713.html#csidxdeb9900881d2069b774f02464d89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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